모든 불경의 첫 구절은 항상 위와 같이 시작된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여시아문 如是我聞)"고 풀면 직역이고
"모든 진실은 있는 그대로에서 비롯된다"고 풀면 의역이다.
성경은 "예수님 가라사대"로 시작된다.
불경은 보고 듣는 청자(聽者)의 객관적 시각이고,
성경은 혼자 말하는 화자(話者)의 주관적 시각이다.
그러니까 불경은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며 '의심할 수 있는 권리'를 남겨놓은 반면,
성경은 “예수님 말씀은 곧 진리이므로 따라야 한다"는 독단적 명령조여서
그처럼 의심할 권리를 처음부터 봉쇄해버린 것이다.
요즘 수구보수 신문과 방송을 보면서 불쑥 든 생각이다.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러한 성경 같은 매체에 '생각하고 의심할 권리'를 차압당하며 살아왔다.
괴물을 물리친 주인공이 TV를 발로 탁 꺼버리던 영화 <괴물>이 떠오른다.
발가락에 낀 때만큼도 못한 공중파 언론에 대한 야유와 조롱이 통쾌하면서도 쓰리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그것을 감추기 위해 한 번 더 거짓말을 해야 한다.
- 시인 이산하 <피었으므로 진다> 중에서
저는 불경을 깊이 들여다 본 적은 없습니다.
저의 의사와 상관없는 그놈에 모태신앙 덕분이겠지만
그런데 성경도 마냥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가장 근간이 되는 부분은 독단적 명령조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상당히 입체적인 구조를 가지거든요.
인간이 무언가를 단편적으로 추릴 때는
편하기 위해서 많은 부분을 삭제 할 경우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문에
'불경은 보고 듣는 청자(聽者)의 객관적 시각이고,
성경은 혼자 말하는 화자(話者)의 주관적 시각이다.' 는
공감합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신이 아니고 진리를 찾아 가는 여행자라면
예수는 신의 아들로 그 범위에 사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 대로 살아야만 하는 원주민?의 입장이었을 테니......
철학은 서로 다른 관점이 자신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는 지키면서 토론하는 것 일텐데...
그런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은 듯 합니다.
다만 이산하 시인의 글을 읽다 마음에 다가와서 옮긴 것입니다.
많이본 문구네요.
如是我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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